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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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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록수갤러리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5-04-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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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김연옥

작품설명

김연옥 kim yeon ok

< 약력 >

경기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원 서양화전공 졸업

개인전
제24회 쉐마미술관, KMJ-ARTGALLERY, 장은선갤러리, 인사아트센터등 (2024~2005)

단체전
김연옥 류지안 2인전/갤러리526
김연옥 최영욱 2인전/갤러리WE
visions of collaboration/조지아 국립문학박물관 전시장 색채 사물 언어에 대한 고찰/쉐마미술관
인천국제여성비엔날레 조율전(2011)
복을 담는 그릇전/아산중앙병원
25인 현대미술전/당림미술관 외250여회

수상
인천미술대전대상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인천문화재단미술은행,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인천해양경찰청, 영림목재갤러리, 명지병원헤브엔어스, 청라쓰리엠타워, 청라커넬힐스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인천미술대전 심사위원, 인천시미술장식품 심의위원역임

현재 : 한국미술협회회원, 창작미술협회회원, 제로섬회원



< 논평 1 >
자연과 사람, 그 접점에서 생명을 노래하다

■ 작가 김연옥의 작업 수행은 복합적 혹은 다원적 트랙을 달리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엄밀히는 세 가지 양식을 축으로 진화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계관이나 미학, 조형적 방법들이 변모해간다. 김연옥 작가의 경우도 시기별로 ‘기하적 추상’ → ‘재현-개념적 추상’ → ‘표현적 추상’으로 이어지는 추이를 보인다. 보통 한 양식이 끝나면 역사에 묻고 새로운 양식으로 넘어가지만, 작가의 경우는 과거의 양식과 현재의 것을 병행하여 발전시켜 간다. 시각적으로 다소 상이한 양식이 공존한다는 것이 흔한 예는 아니지만, 내면적 동기의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어 병행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작가에게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해가는 동인(動因)이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다. 즉 시대의 담론, 트렌드, 스쿨 같은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면의 충동이나 보상적 동기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기하적 추상’과 ‘재현적 추상’은 초집중과 몰입을 요구하는 치밀하고 정교한 도식이나 장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임계치에 달하게 되는 순간이 오곤 한다. 기하적 구성이나 아우라를 발하는 재현도 그러하지만, 작가가 창안한 조형적 장치까지 조합함으로써 도달하는 완성도는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날카롭게 집중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해방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들로 중화시켜야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 김연옥 작가의 플래그쉽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겹’ 연작 혹은 항아리 연작이다. 작가에게 달항아리는 넒은 지평에서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혹은 연결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우리의 전통 도자 혹은 도자화 이미지를 재현 혹은 구성하면서도 추상성의 범주를 띠는 것은 그만의 독자적인 장치에 기인한다. 전통 도자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나 심미성을 회화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재현의 한계가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감싸고 있는, 혹은 너머의 심미성과 얼을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할 때, 보다 창의적인 접근방식을 필요로 했다. 특히 그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우아하고 고상한 원형적 취미의 상징성을 담아내야 하는 과제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현이면서도 재현을 넘어서는 방안으로 극적 무대 효과를 도입한다. 재현적 이미지에다 개념을 탑재시키는 것도 방법이지만, 작가는 장치의 창안으로 풀어나간다. 달항아리 소재를 무대에 등장시키는 전략, 즉 미장센 플랜은 특이한 장치를 창안함으로써 구현된다. 그 방법의 일단이 화면에 가늘게 도드라진 선들의 스트라이프들이다. 컨버스 띠를 한자로 '볼록할 철'자 모양으로 접어 붙인다. 그럼으로써 캔버스에 일정한 간격과 높이의 직선 부조를 형성한다. 이 스트라이프가 화면에 조합되어 조형적인 슈파눙 효과를 조성하게 된다. 시각적으로 마치 블라인드커튼을 열어 무대에 등장하는 백자에 조명을 쏟기 시작하는 듯한 장치로서 정적인 화면에 극적이고 신비적인 서사를 풀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작가의 이러한 비상한 장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2천년대 중반 ‘접점’ 연작에서 시작되었다. ‘겹’ 연작에 비해 훨씬 기하적인 면구성에 예의 스트라이프가 조합되거나, 혹은 이 선들의 반복과 순환이 구성적으로 조성되는 양식이다. 이 양식에서도 순수 기하적 추상에서 반복적 질서에 기반한 단색조 미니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사역되는 장치가 바로 스트라이프 요소들이다. 이렇듯 차갑고 엄밀한 양식이지만, 이 선들은 아주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과 집중력의 결정체들이다. 자연의 비밀이나 역사의 비밀을 기록한 바코드 같은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
  작가가 이렇게 전통도자 세계와의 인연은 좀 각별하다. 어린 시절 부친이 지금의 만수동, 박촌, 여주 등지에서 도자 기업을 운영하였으며, 도자기들은 어린 작가에게 장난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다. 자라면서 그림에 재능을 보이면서 도자화 그리는 일에도 참여했다 한다.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가게 되면서 도자기는 자연스럽게 그림에 투영되게 된다. 특히 단조로우면서도 우아한 곡선미를 지닌 달항아리의 신비스러운 아우라를 구현하는 것이 압권이다. 하나의 무대에 등장하듯이 재현되는 달항아리는 그 어떤 이미지보다 강렬하면서도 우리의 원형에 어필하는 심오한 결정체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작가가 근래 역점을 두는 양식은 ‘봄’, ‘생의 변주’ 연작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설계하여 연출해온 세공 같은 장치들 공정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면서 작가의 내면에 동요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들이마시는 들숨만 있었으니 날숨도 필요하다. 작가의 시그니쳐인 스트라이프 장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안으로부터의 보상과 시너지의 계기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 대안이 바로 ‘표현적 추상’ 양식이며, 작가 스스로 힐링과 재도약의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는 끊임없는 운동, 그것이 우연적이든 자발적이든 움직임을 통해 진화하며 창조성을 발휘한다. 이것은 곧 자연의 본질이기도 하다. 작가의 화면에는 강한 생명의 리듬 혹은 춤사위들이 바람처럼 일고 있다. 대부분이 추상적 표상 너머로 원초적인 미지의 유기체 혹은 생명대사 기관들의 생명현상, 꽃잎이나 바람, 구름 등의 자연 같은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무의식 세계로부터 끌어올린 무언가의 몸짓이 가감 없이 그대로 각인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모종의 리듬으로 환원된 초월적 세계로 상상할 수도 있다. 밝고 흥에 겨운 환희와 경이로움의 환상적인 생명의 율동 그 자체가 관객들에게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보통 4월경이면 자연이 연출하는 대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봄바람이 유난히 거세질 때를 기다렸다가, 소나무들이 일제히 송홧가루를 기류에 실려 보내는 사랑의 퍼포먼스 말이다. 말없는 나무들도 그렇게 본능에, 자연율에 충실하다. 자신의 생명을 널리, 그리고 멀리까지 퍼져나가게 하는 모습. 그것은 자연의 숭고하고도 위대한 퍼포먼스다. 생명체는 자연에 의존하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산종(散種)할 수 없는 개체들이 자연의 역동성에 편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동하는 생명으로 충만할 때 자연은 스스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면에 펼쳐지는 속도감 있는 추상표현적 표상들 역시 생명의 몸짓인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생의 변주’ 연작은 내면의 해방적 에너지에 충실하다는 점이 우연에만 의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숨 막히는 메커니즘에서 벗어난다 해서, 화면을 방종이나 혼돈으로만 흐르게 방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창작활동을 통해 본능적으로 체득한 조형감각 내지는 표현의 내공이 은밀히 작동 혹은 조율되고 있음이 목격된다. 어떤 형상인 듯도 하고, 또 어떤 데서는 선적인 필치들인 듯한 요소들이 화면 전체에 생기와 활력을 배가하는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화면은 무의적 충동과 우연적 몸짓에 의한 필치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요처에서 번득이는 감각적 필치들이 중심추로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작가의 그림들이 시가 되고 노래와 춤이 되는 극적 연출도 바로 이러한 감각적 키노트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 이렇듯 상반된 양식들을 횡단하는 작가 작업은 내적인 요구와 필요에 직면하여 자연스럽게 도출해낸 솔루션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광폭의 조형세계를 누비는 작가의 작업은 들숨과 날숨이 교차되는 미의식적 순환으로 이해된다. 상이한 양식을 병행한다는 사실이 광폭의 역량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하며, 지극히 음과 양의 조화, 들숨과 날숨의 교차처럼 자연스러운 수행으로 파악되고 있다.
  넓은 지평에서 통찰할 때, 작가의 작업은 하나의 매개적 지점으로서, 작가 바깥 세계의 자연과 내면의 자연이 생명의 대사(代謝)를 수행하는 장이자 세계이다. 외부 세계의 에너지와 자극들이 흡입되어 축전지처럼 응축되어 정형성을 이루는 것이 하나이며, 내면의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충동과 욕구들은 미의식의 승화와 건류장치를 통과하면서 생명의 환희를 화면에 쏟아내는 것이 또 하나이다. 그의 작업은 세계의 본질을 음양의 조화로 이해하는 그대로다. 그 섭리대로 자연스럽게 들이마셔야 할 때 흡입하고, 내쉬어야 할 때 뿜어내는 생체의 원리 그대로다. 생각해야 할 때 생각하고 느껴야 할 때 느끼고, 움직여야 할 때 행위하는 그대로다. 자연과 사람, 모두를 매개하는 생명과 생명력을 담아내는 일은 작가에게 너무도 절실한 명제이다.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논평 2>

김연옥, 원형의 가치에 대한 탐색과 실험

김연옥은 접은 면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붙인 개성적 작업방식과 장인적 노고로 형식적인 완결성을 이룬 자신의 작업에 전통적 모티브와 시의성 있는 비판을 개입시킴으로써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부단한 작업과정과 물질의 실험으로 사물의 본질을 추적하고 여기에 내용적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모더니즘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전략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획득한 바 있다. 김연옥은 한국적인 기억 속 이미지, 즉 원형의 상징물(archtype)에 현대인들의 관심요소와 매재(媒材)의 물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현대인의 삶과 욕망을 재구성함으로 속된 가치를 숭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연금술사였던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접합
한국 전통 도자이미지의 꽉차 있으면서도 비어있음을 표현하는 김연옥의 <겹> 연작을 보고 있으면 고전적 감흥과 현대적 미감이 교차함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여전히 면천을 규칙적으로 자른 후 세워 붙여 요철을 만드는 반복적인 노동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의 작업관이 여전히 노동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질료와 형태의 실험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그의 화면은 일정한 패턴을 이루면서 시각적 환기와 촉각적 매력을 발산하게 되는데 이차원적인 평면에서 경험하는 삼차원적 질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작품자체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매몰시킨다. 
김연옥의 예술적 영감과 사유의 저변에는 ‘한국적’, ‘전통’ 등의 용어로 상징될 수 있는 무의식적 존재이미지인 원형적 상징물이 존재한다. 과거 김연옥의 작품에 등장하던 민화이미지나 한복, 버선 등의 형상은 작가의 심상에 원형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들로써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 유용한 도구로 차용된 것이었다. 근자에 이르러 김연옥은 도자기의 형상을 작품에 표상함으로써 전통적 이미지와 현대적 기법을 효과적으로 조응시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최근의 <겹>연작에서 작가는 한국전통의 달항아리 형상을 선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현대적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에 전통적 형태미를 부가함으로써 자연이라는 본질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환기는 물론 현실적 사유와 존재론적 사유의 접점에 위치해 있는 작가의 미적 욕망을 가늠케 한다.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사물에 자연의 힘인 불과 중력, 그리고 흙 등이 서로 작용한 결과가 달항아리이다. 그래서 달항아리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대형 자기들이 보여주는 인공적 완벽성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일그러짐 내지는 불균형이 있다. 그러나 그 일그러진 아름다움은 인공성을 뛰어넘는다. 인공성을 뛰어넘을 때 빚어지는 형태상의 긴장은 팽창해 폭발하려는 항아리와 그것을 붙잡는 흙들의 친화성에서 비롯된다. 김연옥의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작업과정의 치열한 노동이나 시공간적 서사가 억제되고 고요하고 침잠된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그의 작업 역시 인공성을 뛰어넘는 긴장과 이완의 결과물인 것이다.
 
중층성과 단순성의 이중구조
아마도 김연옥이 추구하는 바는 이점일 것이다. 작가의 예술적 사유는 달항아리에 대한 찬미일 수도 있고 이에 내재하는 한국 특유의 심미성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한국 특유의 심미성이란 선배 예술가들이 누차 언급했듯이 인공성과 자연성 사이의 균형과 긴장에서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김연옥의 작품에는 전통과 현대 뿐 아니라 추상과 구상, 평면과 입체, 다양성과 단일성, 시각적 일루전과 촉지 가능성 등 다양한 가치들이 이항대립적으로 존재함을 보게 된다. 이때 평면에서 입체로 보이게 하는 시각적 착시는 점, 선, 면의 구성요소로 반복과 크기를 변화시키고 공간에서의 돌출, 부풀림 등을 이용하여 시각적 움직임, 리드미컬한 역동성을 보여준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표현에 의한 화면구성의 다양성은 물론 옵티컬한 동세에서 시각적 유희를 제공하여 작품 감상자에게 또 다른 차원의 흥미와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형식논리의 산물위에서 시각화된 이미지의 주제(도자기)는 거시적인 우주에 존재하는 원의 형상으로 인식되어 지기도 하고 도자기의 곡선으로부터 여성의 인체를 인식하기도 한다. 작품 속에 나타난 도자기가 갖고 있는 그 자체는 단순한 형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 속에 내장된 단순함, 여백, 부정형이 갖는 무심한 아름다움 등으로 인하여 한국인의 정서와 미가 갖는 의미론적인 성질을 획득한다.”(작가노트)

이를 통하여 작가는“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위기감, 불안감과 같은 심리적 요인을 표현하였으며 이중구조를 통한 반복과 순환의 조형성에서 회화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연옥의 그림은 작가 개인의 시각적 경험과 사유에서 출발하였으나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작품에서 작업과정의 치열한 시공간적 서사과정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순히 면천을 일정간격으로 오려붙이고 형태를 구성해 나간다는 노동의 측면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화면과 작가간의 긴장성이 시시각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이의 원형, 대상의 시공간적 위상, 역사와 전통, 형식과 내용, 조형요소와 작가의 개인적 트라우마 등 예술과 인간적 삶에 관련된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것이다.
 
원형에 대한 탐색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작가는 점에서 출발하여 우주를 포괄하는 다양한 시공간적 경험에 몰입되었을 것이다. 이는 환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 경험에 더 가까우며 미적 욕망주체로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실존적 삶의 영역으로 몰고 감으로써 일상을 규정한다. 김연옥 작업의 외연에 나타나는 원형패턴도 이러한 보편적 무의식의 일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림이 시각적 대상이기는 하지만 감각과 정서가 느껴지는 생각의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 할 때 작가는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 사연, 의미, 그리고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도 읽어내는 내면적인 실체의 공감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작가는 원형의 상징물인 도자기형상을 좀 더 패턴화 된 형태로 진전시키고 이에 따라 흐려진 회화성을 다양한 형식실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통적 드로잉은 물론 뿌리기와 피스작업이 병행된 그의 그림은 중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현대 회화의 다양한 표현기법들이 적용된 수많은 시행착오와 이의 극복과정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옥은 작품자체의 심층형식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부조적 특성과 간결한 이미지만을 관객에게 제시함으로써 작품의 서사성을 은폐한다. 도자기를 표상한 <겹>연작에서 우리는 작가가 대상에 갖는 깊은 애정과 이를 속되지 않게 재현하기 위해 시도한 예술적 고민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원형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나 하나의 보편자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예술적 대상으로 진화함으로써 인간과 삶, 자연과 우주를 포괄하는 규정 불가능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김연옥의 작업은 노동이라는 가치를 화면의 기조로 삼으면서 형식적으로 현대적 조형성의 탐구와 물질의 실험을 통하여 회화적 순수성과 절대성을 포기하지 않고, 내용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적 모티브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와 우주의 섭리를 표상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수겹의 수평적 층위로 이루어진 시간적 장에 단순한 형상의 역사의 편린을 개입시킴으로써 현대적 실험의 장 뿐 아니라 실존적 장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 이경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