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현대미술 - 조광호
페이지 정보

본문
삐딱한 현대미술
(미술은 왜 우리를 배신했는가)
- 조광호
"이게 2억 원짜리야?"
현대미술관에서 한 관람객의 한탄이다. 그가 바라본 것은 캔버스 한가운데 찍힌 빨간 점 하나였다. 그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존재의 응축, 2024, 캔버스에 아크릴, 200×200cm."
하나
고개를 들고 우리는 생각에 잠긴다
야,이거 사기 아니야?
은근히 우리를 화나게 하는
그 뒤에는 배신의 역사가있다.언제부터 미술은 우리를 버렸는가
모든 배신은 1839년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천 년간 인간의 손끝에서 태어났던 '재현의 마법'이 기계에 의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화가들은 절망했다. 더 이상 현실을 그대로 그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인상파가 태어났다. 모네는 말했다: "나는 빛을 그린다." 현실이 아니라 빛을, 순간이 아니라 인상을. 이것이 첫 번째 배신이었다.
피카소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아예 현실을 박살내버렸다. 한 여인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으로 동시에 그렸다. "왜 한 시점에서만 봐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예술사를 뒤흔들었다.
뒤샹은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다. 1917년,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했다. 그 순간 예술의 경계는 영원히 무너졌다.
오늘 우리는 좀 심하게 얘기해서 *모든 것이 예술이다*라고 선언한 이상한
시대,
AI가 세상을 완전히 바꿔가는 시대
놀랍게 전도 된 가치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 바나나를 벽에 테이프로 붙인 것이 1억 5천만 원에 팔린다
- 텅 빈 화이트큐브가 명상의 공간이라 불린다
- AI가 그린 그림이 경매에서 4억 원에 낙찰된다
둘
현대미술의 뿌리에는 하나의 철학적 혁명이 있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칼날이 숨겨져 있다
데리다는 말했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서 생겨난다.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해석이다.
푸코는 덧붙였다. 권력이 진리를 만든다. 미술관이, 평론가가, 시장이 무엇이 예술인지 정한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현대미술의 '오만'은시작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네 무지다."
"감동받지 못한다면, 그건 네 감수성의 한계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진실이 있다. 현대미술은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상품이 되었다.
왜? 그런가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점 하나를 찍고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선언하면, 그 순간 그것은 투자상품이 된다.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가격만이 중요하다.
갤러리스트는 작가를 키우고, 평론가는 의미를 부여하고, 컬렉터는 투자하고, 언론은 화제를 만든다. 완벽한 생태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해할 수 없음'*이 있다.
이해할 수 없을수록 더 비싸다.
설명이 복잡할수록 더 깊이 있다고 여겨진다.
돌이켜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20년 동안 『모나리자』를 그렸다. 매일 붓질을 다듬고, 색감을 조절하고, 표정을 완성해갔다. 그 결과물 앞에서 사람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감탄한다.
현재 대부분의 현대미술 작품은 어떤가?
작가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실제 제작은 어시스턴트가 한다. 심지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기도 한다. 제프 쿤스의 작품들이 그렇다. 그는 디자인만 하고, 실제로는 200명의 직원이 만든다.
기술 없는 예술, 그것이 과연 예술일까?
위대한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독일인이든 한국인이든, 18세기 사람이든 21세기 사람이든 감동시킨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르다. 맥락을 알아야 하고, 배경을 공부해야 하고, 해석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멍청한 사람" 취급받는다.
*예술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예술을 느끼는 것일까?*
감정을 부정하는
현대미술계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다: **"예쁘다"고 말하지 마라.*는
미학적 테러리즘: 현대미술의 폭력이있다
아름다움은 천박하다고 여겨진다. 감동은 진부하다고 취급된다. 대신 이런 말들이 난무한다:
"해체적이다"
"전복적이다"
"포스트모던적이다"
"메타텍스트적이다"
*언제부터 예술에서 아름다움과 감동이 죄가 되었을까?*
더 심각한 것은 현대미술이 철저한 엘리트주의의 폭력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층은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 컬렉터
하층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일반 대중
"너희는 몰라도 돼. 우리끼리 하는 거야."
이것이 현대미술계의 숨겨진 메시지다. 예술이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쯤되면 이제 막가자는거냐 *하고
너들 끼리 잘 해봐라하고
단절 해 버릴수있음에도불구하고
현대미술은 진짜 가치가 있는가 하고
또 다시 질문하는 용기를 내보자
그런데 이지점에서
하나의 역설이 번뜩인다
현대미술의 가장 큰 공헌은 *질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것을 보고 감동하는가?"이다
어쩌면 이 질문이 오늘 헌대미술의
맨 얼굴이 아닐까
셋
뒤샹의 변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것이 예술이라면,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현대미술은 표현의 자유를 극한까지 확장했다. 이제 예술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릴 수도 있고, 설치할 수도 있고, 퍼포먼스할 수도 있고, 개념만 제시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진보다. 과거의 예술이 기법과 주제의 틀에 갇혀 있었다면, 현재의 예술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점 하나 잘 찍으면 미술이 마술이 된다?"*
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첫 번째 조건은 진정성이다
그 점 하나에 작가의 진정한 사유와 경험이 담겨야 한다. 단순히 유행을 따라 하거나, 시장성을 고려해서 찍은 점이라면 그것은 마술이 아니라 사기다.
두 번째 조건은 소통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깊은 의미가 있어도, 그것을 타인과 나누려는 의지가 없다면 예술이 아니라 자위행위다. 예술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조건으로는 감동의 가능성이있어야한다
설명 없이도, 해석 없이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과 철학의 차이다.
이런 현대미술의 흐름속에
교회미술을 보면
많은생각이든다
둥그런 얼굴에 무심히
그려넣은 눈
코, 입을대충그려 놓고
얼굴 뒤에 후광을 그린다
ㅡ오늘 우리가톨릭교회 성당에서
싑게 볼수 있는 이른바 교회 미술이다
또 다른 미술의 폭력이 우리의 이성과
감수성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찾아야 할 점은 무엇인가
현대미술이 타락했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도 너무 단순한 판단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외워서 출세하는 공부가 전부인 사회
신부되는 신학교에서도
잘 외워서 시험점수 잘 받는것을
공부라고 생각한 탓이 그 모든
결과를 낳고 있다
애석하고 참담하지만 매마른 감성
비틀어져버린 감수성
오늘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짜 감동*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은 점점 빨라지고 얕아졌다. 5초 안에 자극이 없으면 지루해한다. 15초 안에 웃기지 않으면 다음 콘텐츠로 넘어간다.
이런 우리에게 모나리자의 미소는 너무 느리고, 베토벤의 교향곡은 너무 길고, 로댕의 조각상은 너무 정적이다.
*문제는 현대미술이 아니라 현대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현대미술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거나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점 하나"*를 찾는 것이다.
진정성과 소통의 의지와 감동의 가능성이 모두 담긴, 그 하나의 점을.
그 점을 찾는 순간, 미술은
다시 마술이 될 것이다.
*"예술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통해 우리는 진실에 도달한다." - 파블로 피카소
*
글쓴이 약력:
가톨릭대학을 졸업, 서품 후, 주교단출판국장. 독일 누른베르그 미대에서 현대미술을전공. 인천가톨릭대학에서 근무 후 은퇴 강화동검도채플&갤러리 문화예술영성 사목과 작업
(미술은 왜 우리를 배신했는가)
- 조광호
"이게 2억 원짜리야?"
현대미술관에서 한 관람객의 한탄이다. 그가 바라본 것은 캔버스 한가운데 찍힌 빨간 점 하나였다. 그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존재의 응축, 2024, 캔버스에 아크릴, 200×200cm."
하나
고개를 들고 우리는 생각에 잠긴다
야,이거 사기 아니야?
은근히 우리를 화나게 하는
그 뒤에는 배신의 역사가있다.언제부터 미술은 우리를 버렸는가
모든 배신은 1839년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수천 년간 인간의 손끝에서 태어났던 '재현의 마법'이 기계에 의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화가들은 절망했다. 더 이상 현실을 그대로 그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인상파가 태어났다. 모네는 말했다: "나는 빛을 그린다." 현실이 아니라 빛을, 순간이 아니라 인상을. 이것이 첫 번째 배신이었다.
피카소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아예 현실을 박살내버렸다. 한 여인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으로 동시에 그렸다. "왜 한 시점에서만 봐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예술사를 뒤흔들었다.
뒤샹은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다. 1917년,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했다. 그 순간 예술의 경계는 영원히 무너졌다.
오늘 우리는 좀 심하게 얘기해서 *모든 것이 예술이다*라고 선언한 이상한
시대,
AI가 세상을 완전히 바꿔가는 시대
놀랍게 전도 된 가치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 바나나를 벽에 테이프로 붙인 것이 1억 5천만 원에 팔린다
- 텅 빈 화이트큐브가 명상의 공간이라 불린다
- AI가 그린 그림이 경매에서 4억 원에 낙찰된다
둘
현대미술의 뿌리에는 하나의 철학적 혁명이 있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칼날이 숨겨져 있다
데리다는 말했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서 생겨난다.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해석이다.
푸코는 덧붙였다. 권력이 진리를 만든다. 미술관이, 평론가가, 시장이 무엇이 예술인지 정한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현대미술의 '오만'은시작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네 무지다."
"감동받지 못한다면, 그건 네 감수성의 한계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진실이 있다. 현대미술은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상품이 되었다.
왜? 그런가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점 하나를 찍고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선언하면, 그 순간 그것은 투자상품이 된다.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가격만이 중요하다.
갤러리스트는 작가를 키우고, 평론가는 의미를 부여하고, 컬렉터는 투자하고, 언론은 화제를 만든다. 완벽한 생태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해할 수 없음'*이 있다.
이해할 수 없을수록 더 비싸다.
설명이 복잡할수록 더 깊이 있다고 여겨진다.
돌이켜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20년 동안 『모나리자』를 그렸다. 매일 붓질을 다듬고, 색감을 조절하고, 표정을 완성해갔다. 그 결과물 앞에서 사람들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감탄한다.
현재 대부분의 현대미술 작품은 어떤가?
작가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실제 제작은 어시스턴트가 한다. 심지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기도 한다. 제프 쿤스의 작품들이 그렇다. 그는 디자인만 하고, 실제로는 200명의 직원이 만든다.
기술 없는 예술, 그것이 과연 예술일까?
위대한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독일인이든 한국인이든, 18세기 사람이든 21세기 사람이든 감동시킨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르다. 맥락을 알아야 하고, 배경을 공부해야 하고, 해석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멍청한 사람" 취급받는다.
*예술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예술을 느끼는 것일까?*
감정을 부정하는
현대미술계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다: **"예쁘다"고 말하지 마라.*는
미학적 테러리즘: 현대미술의 폭력이있다
아름다움은 천박하다고 여겨진다. 감동은 진부하다고 취급된다. 대신 이런 말들이 난무한다:
"해체적이다"
"전복적이다"
"포스트모던적이다"
"메타텍스트적이다"
*언제부터 예술에서 아름다움과 감동이 죄가 되었을까?*
더 심각한 것은 현대미술이 철저한 엘리트주의의 폭력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층은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 컬렉터
하층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일반 대중
"너희는 몰라도 돼. 우리끼리 하는 거야."
이것이 현대미술계의 숨겨진 메시지다. 예술이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쯤되면 이제 막가자는거냐 *하고
너들 끼리 잘 해봐라하고
단절 해 버릴수있음에도불구하고
현대미술은 진짜 가치가 있는가 하고
또 다시 질문하는 용기를 내보자
그런데 이지점에서
하나의 역설이 번뜩인다
현대미술의 가장 큰 공헌은 *질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것을 보고 감동하는가?"이다
어쩌면 이 질문이 오늘 헌대미술의
맨 얼굴이 아닐까
셋
뒤샹의 변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것이 예술이라면,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현대미술은 표현의 자유를 극한까지 확장했다. 이제 예술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릴 수도 있고, 설치할 수도 있고, 퍼포먼스할 수도 있고, 개념만 제시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진보다. 과거의 예술이 기법과 주제의 틀에 갇혀 있었다면, 현재의 예술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점 하나 잘 찍으면 미술이 마술이 된다?"*
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첫 번째 조건은 진정성이다
그 점 하나에 작가의 진정한 사유와 경험이 담겨야 한다. 단순히 유행을 따라 하거나, 시장성을 고려해서 찍은 점이라면 그것은 마술이 아니라 사기다.
두 번째 조건은 소통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깊은 의미가 있어도, 그것을 타인과 나누려는 의지가 없다면 예술이 아니라 자위행위다. 예술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조건으로는 감동의 가능성이있어야한다
설명 없이도, 해석 없이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과 철학의 차이다.
이런 현대미술의 흐름속에
교회미술을 보면
많은생각이든다
둥그런 얼굴에 무심히
그려넣은 눈
코, 입을대충그려 놓고
얼굴 뒤에 후광을 그린다
ㅡ오늘 우리가톨릭교회 성당에서
싑게 볼수 있는 이른바 교회 미술이다
또 다른 미술의 폭력이 우리의 이성과
감수성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찾아야 할 점은 무엇인가
현대미술이 타락했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도 너무 단순한 판단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외워서 출세하는 공부가 전부인 사회
신부되는 신학교에서도
잘 외워서 시험점수 잘 받는것을
공부라고 생각한 탓이 그 모든
결과를 낳고 있다
애석하고 참담하지만 매마른 감성
비틀어져버린 감수성
오늘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짜 감동*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은 점점 빨라지고 얕아졌다. 5초 안에 자극이 없으면 지루해한다. 15초 안에 웃기지 않으면 다음 콘텐츠로 넘어간다.
이런 우리에게 모나리자의 미소는 너무 느리고, 베토벤의 교향곡은 너무 길고, 로댕의 조각상은 너무 정적이다.
*문제는 현대미술이 아니라 현대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현대미술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거나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점 하나"*를 찾는 것이다.
진정성과 소통의 의지와 감동의 가능성이 모두 담긴, 그 하나의 점을.
그 점을 찾는 순간, 미술은
다시 마술이 될 것이다.
*"예술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통해 우리는 진실에 도달한다." - 파블로 피카소
*
글쓴이 약력:
가톨릭대학을 졸업, 서품 후, 주교단출판국장. 독일 누른베르그 미대에서 현대미술을전공. 인천가톨릭대학에서 근무 후 은퇴 강화동검도채플&갤러리 문화예술영성 사목과 작업
- 다음글성실함의 뿌리와 한국미술 - 김미경 25.07.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